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실리 스탈린 (문단 편집) === 초고속 승진과 패악질 === 1940년 뒤늦게 군사학교를 졸업하여 공군 [[중위]]로 임관[* 소련군은 군종별로 사관학교가 1개씩 있는 서방과 달리, 특기별로 나뉜 사관학교가 여럿 존재한다. 교육기간도 상이해서 2~4년제가 혼재하며, 4년제는 중위, 그 이하는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는 차이를 둔다.]했고, 이후 최고지도자의 아들로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41년 [[대위]]로 승진하였다. 그해 7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가 [[육군]] [[포병]] [[중위]]로 최전선에 투입된 반면 바실리는 [[모스크바]]에 주둔하며 스탈린의 [[다차]]에서 흥청망청 파티를 벌이며 소일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탈린의 아들이란 이유로 승진을 거듭했고 지상공격기 [[Il-2]]를 타고 26번 출격한 공로[* 망나니짓을 해서 임관이 굉장히 늦긴 했지만 어쨌든 조종 훈련을 받아 전투기를 몰 줄은 알았다. 보통의 인민 같다면 이런 방탕한 짓을 할 때 바로 [[굴라그]]행인 것을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하지 않은 것은 특혜라 할 수 있지만, 어쨌건 전공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나름 독일군 전투기 격추도 세 번이나 했다.]로 1943년 공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비행 [[연대장]]을 맡았다. 1941년 7월 야코프 주가슈빌리는 최전선에서 중위로 싸우다 [[나치 독일]]에 붙잡혔고[* [[독소전쟁]] 발발이 1941년 6월이기 때문에 개전 한 달만에 붙잡힌 셈이다.] 스탈린은 전시수상으로서 '내 모든 아들들이 그곳에 있다' 라고 말하며 아들의 구조를 포기했다. 그러나 야코프 주가슈빌리는 1943년 결국 수용소에서 사망한다. 의젓했던 아들의 죽음에 스탈린은 상당히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스탈린의 양자 아르툠도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자[* 죽은 야코프와 달리 아르툠은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스탈린은 바실리를 더 이상 출격시키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독일놈들이 내 아들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씹어뱉었다. 1943년 4월, 부하들과 [[낚시]]를 나가서 '''폭탄을 이용해서 낚시를 하려다가'''[* 미친 짓 같아 보이지만 한국에서도 군이나 건설현장 등 폭약을 다루는 곳이라면 과거에는 심심찮게 해오던 짓이다. 충격파로 기절한 물고기들이 수 백 마리씩 수면으로 둥둥 떠다닌다. [[유해어법]]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오래된 방법이다.] 실수로 장교 한 사람이 사망하고 바실리 자신도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스탈린은 노발대발했고 크렘린 병원에서 치료받던 바실리에게 국방 인민위원 명의로 징계를 내렸다. ||1. V. I. 스탈린을 비행연대 지휘관직에서 즉시 해임하고, [[이오시프 스탈린|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체의 지휘관직을 맡기지 않는다. 2. 해당 연대와 이 연대의 전 지휘관 스탈린 대령에게, 그가 폭음과 방탕, 그리고 연대를 타락시키고 문란케 한 행위로 인해 직위에서 해임되었음을 통보한다.|| || 1943년 5월 26일, 국방 인민위원 I. V. 스탈린. ||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정말로 혼내진 않을 것이라 믿던 바실리의 방종한 행동은 끝을 몰랐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실이 되었다.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 주의를 주거나 다소 나무라는 일은 있었어도 바실리의 직위를 해제하거나 강등시키는 일은 없었다.] 바실리는 계속 승진을 거듭했고 1945년 즈음에는 24세의 나이로 공군 [[중장]]까지 승진했다. 바실리는 거듭된 방탕한 파티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으며 알코올 중독으로 얻은 만성질환으로 인하여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계속 골골댔고 스탈린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공군 내부에서도 바실리의 추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소련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던 [[동독]]에 파견되었다. 1946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7년 [[중장]]으로 진급했고,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자신에게 아첨하는 패거리들을 몰고 다니면서 온갖 사치를 부렸다. 그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겐 얼마든지 [[금일봉]]을 내리거나 감옥에 보낼 수 있었으므로 스탈린의 경호실장 니콜라이 블라시크마저도 바실리에게 아첨하였다. 그러나 바실리는 끝을 몰랐다. 1952년 5월 1일, 바실리는 나쁜 기상 상태 때문에 비행을 금한다는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위험천만한 [[에어쇼]]를 지시했다. 전투기 몇 대가 역사박물관 첨탐 사이를 통과하여 [[붉은 광장]] 위를 날아다녔는데 이는 스탈린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었으므로 격노한 스탈린은 바실리를 해임시켰다. 그럼에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술과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을 보다못한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 자신은 7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면서 그를 참모본부 부속대학 청강생으로 집어넣어 공부를 시켰지만 바실리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전히 폭음과 난봉꾼 짓에 정신이 없었다. 이 시점에서 바실리는 지나친 폭음으로 건강까지 나빠져 생명이 위태로운 수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